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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황교익의 Epi-Life] 진해 벚꽃난장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진해 군항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해 벚꽃장’이라고 했습니다. ‘-장’은 시장이라는 뜻입니다. 벚꽃장은 ‘벚꽃이 피는 기간에 열리는 시장’입니다. 일정한 조건을 갖춘 상인이 일정한 구역에서 물건을 파는 상설 시장이나 오일장과는 달리, 벚꽃이 피는 진해 전역에서 온갖 것을 팔고사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곡마단이 원형 천막을 쳤고, 냉차 파는 수레가 돌아다녔으며, 야바위꾼이 좌판을 깔았습니다. 이런 시장을 난장이라고 합니다.진해가 군항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벚꽃이 주제인 축제인데 그 이름을 군항제라고 붙이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군항제라는 이름이 있어도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진해와 마산 사람들은 벚꽃장이라고 했습니다. 벚꽃난장이라고 불렀으면 더 정감이 있었을 터인데, 그런 말을 쓰는 어른은 없었습니다. 난장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린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본 진해 벚꽃장은 난장이 분명했습니다.진해 벚꽃난장에는 친인척이나 동네, 직장 단위로 그룹을 지어 놀러 갔습니다. 벚꽃 아래에 진을 치고 놀아야 하니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 일찍 나섰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진해 벚꽃난장에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넥타이를 한 정장, 여자는 한복을 입었습니다. 여자는 양산이 필수였습니다. 미혼 청춘들은 벚꽃난장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남자는 말끔하게 이발을 했고 여자는 앞머리에 힘을 주는 고데를 했습니다. 남녀 교제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벚꽃난장은 ‘연애 해방구’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벚꽃난장에서는 도시락을 먹습니다. 우리 가족은 5단 정도의 찬합을 두 개 이상 들고 갔습니다. 술도 가져갔습니다. 됫병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소주인지 청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게에다 막걸리통을 지고 오는 어른도 보았습니다.또 하나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게 있습니다. 장구입니다. 벚꽃 아래에 음식과 술을 펼쳐놓았으니 노래하고 춤추고 놀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야전(야외 전축)이나 통기타 같은 것이 아직 없었던 때입니다. 장구가 최고의 반주 악기였습니다. 두당탕탕 두당탕탕 장구 소리에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른 어른들이 ‘떼창’을 하며 춤을 추었습니다.아이들에게는 마땅한 놀 거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장구 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어른들을 구경하며 앉았다가, 심심하면 벚나무 사이로 뛰어다녔다가, 어쩌다 냉차 한 모금 얻어 마셨다가 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핵가족 시대의 가족 나들이는 아이들 놀이 중심이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1922년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이들은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아주 어린 저에게는 놀 거리가 없는, 어른들끼리 벚나무 아래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벚꽃난장이었지만, 봄에 벚꽃만 피면 진해 벚꽃난장의 추억이 떠올라 행복감에 가슴이 쩌르르합니다. 제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진해 벚꽃난장의 풍경은 “화사한 벛꽃 아래에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어른들”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르고 절대 빈곤에서 허덕여야 했던 우리 어버이들이 그날만은 근심 걱정을 다 버리고 신나게 놀았습니다.지난주 아들 녀석이 진해에 놀러 간다며 뭘 먹으면 좋겠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진해에 가본 지가 언제인데 제가 알 리가 있겠는지요.“예전에 시계탑 로터리에 화상이 하는 만둣집이 있었지. 유리를 끼운 미닫이문을 하고 있었고. 물만두 하나만 내었지, 아마. 보들보들 입 안에 넘기는 맛이….”이제는 사라졌을, 40년 전 즈음의 시계탑 로터리 만둣집을 추억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진해 맛집을 검색하던 아들 녀석이 이런 말로 분위기를 깨버렸습니다.“진해에서 먹지도 자지도 말래. 바가지라고.”벚꽃이 피면 진해 남산 계단을,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했던 것처럼, 하나 둘 셋… 삼백육십오까지 세면서 오르고픈 마음이 굴뚝같으나 올해도 그때의 벚꽃난장을 추억하며 이렇게 자판이나 두들깁니다. 2024.04.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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